나는 91살의 ‘광복군’, 나라 잃은 아픔 뼈에 새긴 작은 태극기y
일반

나는 91살의 ‘광복군’, 나라 잃은 아픔 뼈에 새긴 작은 태극기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로 기사보내기 미투데이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로 기사보내기 구글로 기사보내기 싸이월드로 기사보내기

입력 : 2015-12-12 00:01:13 | 수정 : 2015-12-14 15:22:21

프린트 | 기사 스크랩     글자작게글자크게


애국지사 김영관 할아버지, 역사의 페이지에 녹아든 삶의 기록
태어났을 때는 이미 나라를 잃은 뒤였다.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장악했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였지만 그 사이 민중의 삶은 일장기에 억눌려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애국지사 김영관(91) 할아버지는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포천 영평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지배가 일상인 시대에 나서 보통학교·중학교를 나오고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의 착취와 차별은 공기처럼 햇빛처럼 한반도를 가득 메웠다. 압제는 불가항력적이었고 잔인하고 지독했다. 망국의 슬픔이 삶을 집요하게 갉아 먹었다. 설움과 고통은 어딜 가더라도 피할 수 없었다.

애써 지은 농사는 모두 일본의 차지였다. 쌀의 이동은 금지 당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교사는 유배처럼 먼 학교로 쫓겨났다. 일본은 한국 사람을 제압할 때 한국 사람을 이용했다. 높은 직위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말단에 한국인을 배치해 앞잡이 노릇을 시키고 한국인을 못살게 굴었다. 이한제한(以韓制韓) 수법이다. 어린 시절 김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커졌다. 일본에 대한 무언의 반항으로 상투를 자르지 않던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인에 의해 머리카락을 잘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일본과는 상종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광복군 김영관 할아버지. (뉴스한국)

어릴 때 풍문으로 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다짐’
김 할아버지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다 중국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임정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당장 뭘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 마음속에 ‘내가 망국의 백성은 아니구나’하는 자존심이 서릿발처럼 고개를 들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김 할아버지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일만은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선택한 진로였다. 당시 일본은 교원 양성을 위해 사범학교 학생의 입영을 면제했었다. 1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지만 김 할아버지는 입학한 그 해 9월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일본이 지원병이 부족하다며 1924년생을 시작으로 징병제를 시작했던 것이다.

1944년 9월 20일 입대한 김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싸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을 부여잡았다. 중국 충칭에 임정 있다는…. 이때부터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임정 광복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조직됐다.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한 일본인 장교는 명문고를 나와 명문학교에 들어간 그에게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할 것을 제안했다.

한 달 간의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으로 갈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갈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일개 한국인 병사에게 한 치 앞의 미래도 알려주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한 후에야 목적지가 중국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보름 가까이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그는,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 갈 계획을 세우는 데 정신을 쏟았다. 열차는 중국 저장성 의오역에서 멈췄다. 항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지역이었다. 탈출을 약속한 다른 한국인 소년들 몇몇이 있었지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일본군의 지휘 아래 뿔뿔이 흩어졌고 인사도 없이 허망하게 헤어져야 했다.

그는 의오 남서쪽에 있는 동양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더 치열하게 계획을 세웠다. 고민과 수정을 반복하며 계획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정황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당시 중국에는 모택동의 팔로군과 장개석의 국부군 그리고 일본이 중국 남경에 세운 괴뢰정부의 군대도 있었다. 일본은 중국의 주요 해안 지대를 점령했지만 오지까지는 접수하지 못했다. 그 깊숙한 지역의 도시는 왕징웨이가 일본과 화평을 선언하고 세운 괴뢰정부를 통해 장악했다. 김 할아버지는 훈련을 하며 정세를 살피고 지형을 익히며 부대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괴뢰군의 초소와 장개석 군의 위치를 각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군에서 만난 한국인 동료들과 슬쩍 슬쩍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던 중 탈출 날짜를 결심하고 함께 가기로 한 동료들과 최종 일시와 도주로를 공유했다. 두 명은 찬성했지만 다른 두 명은 ‘탈출 생각이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미뤘다. 그들은 탈출조에서 빠졌다.

감시를 피해 탈출
김 할아버지는 훈련을 받거나 내무반 생활을 할 때 일본인 동료로부터 일상생활을 감시당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동료가 김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탈출하기로 한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낌새를 챘는지 상부의 움직임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삼엄한 경계 탓에 이미 한 차례 탈출 기회를 놓친 후였다. 김 할아버지는 또다시 탈출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디데이를 12월 3일 일요일 저녁 식사 후로 잡았다. 다른 두 명과 만날 1차 접선지점과 시각, 도주 방향을 확정했다.

김 할아버지가 속한 부대는 본부에서 떨어져 주변 보안이 철저하지 않았다. 중대 본부는 주변에 이중으로 철조망을 쳐두었지만 김 할아버지가 지내는 내무반은 민가를 개조한 것으로 주변 철조망도 흉내만 낸 정도였다. 부대를 빠져 나올 적절한 시점을 모색하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이느라 극도로 긴장했다. 긴장했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탈출에 실패하면 총살형이었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 밖에는 기댈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감을 지탱하는 것은 뼈에 새겨진 나라 잃은 한이었고 일제의 실정에 대한 분노였다.

탈출하며 가져갈 필수품을 전대에 차고 외투를 걸친 후 저녁식사가 차려진 2층으로 향했다. 김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2층에 올라가자 대기하던 병사들이 습관적으로 돌아봤다.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김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고 평소와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날은 붉은 팥밥이 나왔다. 일본에서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붉은 팥밥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밥을 보며 김 할아버지는 속에 자신감이 생겼다. 마치 탈출 성공을 미리 축하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탈출할 시각이 다가왔다. 병사들이 중대 본부로 이동해 목욕을 하는 사이 미리 약속한 돌다리 밑으로 조용히 이동해 탈출할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베고상(神戶高商) 출신 일군 병사가 목욕을 같이 가자며 들러붙었다. “속이 나쁘고 감기에 걸려서 못 가겠다”고 하니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간다”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뿌리쳐도 고베고상 출신 병사는 미동도 않고 옆을 지키고 섰다. 김 할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화장실에 간다며 개울 옆 임시 변소로 향했다. 위아래가 뻥 뚫리고 가운데만 거적으로 열고 닫는 허술한 구조였다. 변소에 들어가 막사를 보니 그는 방호벽에 얼굴을 올려두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속이 바싹 바싹 타들어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거적을 조금 걷어 방호벽을 보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김 할아버지는 이 때다 싶어 변소에서 뛰쳐나와 돌다리로 향했다. 만나기로 했던 한국인 병사 둘이 안절부절 서 있다 화들짝 놀랐다. 김 할아버지는 “일단 뛰어라 목표는 저 산 밑이다”는 말을 하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리면서도 모자는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었다. 증거가 남으면 뒤를 밟힐 수도 있었다. 저 쪽에 괴뢰 중국군 초소가 보였다. 그 초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넘어야 했다. 도랑을 따라 가다 둑을 기어오르고 논바닥을 달려 안전한 산 밑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일본군 막사를 보니 허연 석회가 칠해져 있는 벽이 보였다. 일본군 막사는 안개 속에서 조용했다. 일본군 입대 두 달여 만이었다.

광복 후 김 할아버지는 중국 상해에서, 일본군에서 함께 탈출하려다 포기했던 오래전 동료를 만난 적이 있다. 동료는 “너희들이 탈출에 성공할 줄 알았다면 같이 갈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이 동료의 말에 따르면 김 할아버지가 탈출한 후 사흘 동안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동원해 막사를 중심으로 이웃동네까지 정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세 놈을 저 곳에서 발견해 총살로 즉결처분했다. 너희들은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잘하라’고 협박하는 동시에 담배와 과자를 주며 탈출에 대한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한다.

광복군, 죽을망정 포기하지 않은 길
그렇게 가까스로 일본군에서 탈출했지만 본격적인 고생은 그 때부터 시작했다. 임정을 지원하는 중국군의 도움으로 광복군까지 가는 여정을 시작했지만 과정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연속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적잖은 고통이었다. 김 할아버지 일행은 물 때문에 차례로 풍토병에 걸렸다. 맨 마지막으로 병에 걸렸던 김 할아버지는 열이 40도까지 올라 온 몸에 있던 이가 시커먼 보리쌀처럼 죽어 후드득 떨어졌다. 당시 밤에는 마구간에 지푸라기를 깔고 외투를 덮고 잤던 터라 이가 온 몸으로 파고들었었다. 식사도 여의치 않았다. 두터운 돼지비계로 낸 기름에 야채를 볶아 밥과 함께 먹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그나마 아침에는 미음과 꽈배기가 전부였다. 부실한 음식 탓에 체력이 떨어지니 풍토병을 이길 힘이 없었다. 약을 먹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풍토병 때문에 김 할아버지는 산송장처럼 변했다. 김 할아버지를 안내하는 중국군은 주민 중에서 사람 몇을 징벌해 김 할아버지를 들게 했다. 삼태기에 김 할아버지를 앉힌 후 대나무를 어깨에 메고 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삼태기가 출렁거렸다. 실려 가는 김 할아버지도 힘들지만 장정을 메고 가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안내 중국군 일행이 저만치 멀어지자 주민들이 갑자기 삼태기를 땅에 내려놓더니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겨우 숨만 쉬고 있던 김 할아버지는 ‘이렇게 죽나보다’하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를 뒤늦게 발견한 안내 중국군이 총을 쏘며 주민들을 뒤쫓았지만 헛수고였다. 중국군인 둘이 대나무로 들것을 만들어 김 할아버지를 실고 갔는데 갑자기 대나무가 뚝 부러지면서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다.

일본군을 탈출해 병마와 싸워가며 한 달 만에 하구진에 도착했다.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가는 도중 다른 부대에서 탈출한 두 명의 한국인과 만났다. 그렇게 5명의 청년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광복군에 한 발짝 다가섰다. 김 할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그는 태극문양과 4괘가 함께 그려진 온전한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등 제각기 광복군을 찾아와 있던 15명의 한국인이 김 할아버지를 포함한 5명을 태극기를 흔들며 반겼다. 그들의 입에서는 구슬픈 애국가가 함께 흘러나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아직 멜로디가 정해지지 않아 애국가를 ‘그리운 옛날’이라는 뜻의 스코틀랜드민요 ‘올드랭사인’ 가락에 맞춰 불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졸업식 노래(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에 애국가 가사를 넣어 부른 것이다. 태극기를 든 채 애잔한 애국가를 비장하게 부르는 이들을 보며 김 할아버지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내가 저 태극기를 보려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구나. 태극기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겠다’고 생각했다.

김 할아버지가 근래에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태극기가 있다. 육군종합행정학교인 남성대에 갔다가 받은 것이다. 그는 태극기를 차에 두고 볼 때 마다 하구진에서 병사들이 반겨주며 들고 있던 태극기가 떠올랐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고 훈련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작은 태극기 하나 쉽게 여기지 않는 모습을 보며 주변에서는 ‘광복군 다녀온 사람은 다르네’라고 한 마디 던지곤 한다.

(뉴스한국)
광복군에 입대한 후 제대로 알게 된 정세…광복에 대한 확신
하구진의 광복군 수는 점차 늘어 40명에 달했지만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적은 숫자였다. 김 할아버지는 하구진을 거쳐 강서성 상요에 있는 광복군 징모 제3분처와 같이 활동했다. 광복군에서 정세를 살피며 일본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패망과 광복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분명히 조국이 독립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인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5년 아니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체 광복군 수는 6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군은 숫자도 적었지만 워낙 최일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탓에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무장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장개석 군이 지원한 개인화기로 무장하긴 했지만 형편이 열악했다. ‘충분한’ 무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김 할아버지를 포함한 광복군은 상황의 논리에 빠지지 않았다. 적은 숫자일망정 ‘나라를 되찾겠다’는 푸른 기백과 뜨거운 동지애가 넘쳤다. 여러 계통과 그룹으로 나뉘어 분열하고 서로 견제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찾겠다’는 목표가 같아서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마음이 순수한 탓에 뜻을 합칠 수 있었다.

광복군은 중국군·영국군·미군의 핵심 사령부에 근무하며 정보 핵심을 움직이는 역할을 했다. 일본군의 배치 상황과 무장 상태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나 일본군 통신과 포로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통해 일본군의 취약점을 분석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원형인 첩보기관전략사무국(OSS) 특별 훈련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한 광복군이 규모에 비해 독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국에 침투해 한미합동작전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것에 대비한 유격전 훈련도 이뤄졌다. 이는 출동 시기에 앞서 일제가 항복하면서 실현하지 못했다.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략에 참여한 광복군에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나라는 빛을 되찾았다. 김 할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기고 국권을 회복하는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며 관통했다. 동시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 중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해방을 맞이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누군가는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 한 젊은이가 품었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이를 행동으로 옮긴 용기를 폄하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군의 편에 서지 않겠다’, ‘광복군이 되겠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을 불사한 탈출 과정을 거쳐 끝내 광복군에 입대한 아름다운 마음과 용기는 어떤 말로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김 할아버지는 광복 이듬해 3월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복군은 1946년 5월 복원(전시 체제의 군대를 평상 체재로 전환해 군인 소집을 해제 함)했지만 국군의 모체가 됐다. 김 할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격동의 순간들을 묵묵히 지냈다. 그리고 오랜 공직생활을 하며 서서히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아직 늙지 않은 젊은이가 있다. 일선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다는 긴장감 탓에 사진을 찍을 여력도 없이 광복을 맞았던 젊은이가 있다.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없지만 그의 삶과 시간은 역사의 행간에 여백으로, 호흡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힘겨운 역사의 한 지점을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지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십 년이 흐른 이후에도 그 날의 순간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빛나는 태극기의 어느 한 점을 이루는 자랑스러운 이름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푸르렀던 마음으로 인해 그는 여전히 청년 광복군임도 분명하다.
광복군이 말하는 광복군
대한민국 정부가 김영관 할아버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뉴스한국)
김영관 할아버지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몸과 목숨을 바친 노고를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의 독립을 이끈 그의 이름은 ‘김영관’이 아니라 ‘애국지사 김영관’이다. 지난해까지 광복군동지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 할아버지와 인터뷰는 4시간이 가까이 이어졌다. 아흔이 넘은 노구였지만 그는 광복군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과정과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새겼던 독립 의지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생생하게 들려줬다. 김 할아버지가 역설했던 ‘광복군의 역할’을 옮긴다. (카이로선언과 관련한 설명 중에는 기자가 추가로 덧붙인 부분이 있다.)

“광복군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겠다. 혹자는 광복군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전투를 한 적도 없고 그저 뒤에서 밥만 먹고 앉아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었고, 나는 광복군의 역할과 의미를 여덟 가지로 요약해 말하겠다.

첫째, 우선 역설적으로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이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해방한 후 연합군이 한민족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했겠나.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국군이 없으면 정부도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둘째, 임시정부가 남의 나라에 있었지만 독립정부로서 행사했다. 광복군도 중국군에 예속하지 않고 독립정부의 국군으로서 임시정부의 통수권 하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셋째,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에 영향을 줬다. 카이로선언을 발표하기 전 중국 장개석은 한국이 독립할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며 연합국 대표를 설득했다. 처칠 영국 수상은 반대했지만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인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는 조항이 생겼다. 카이로선언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한 것이다. 장개석의 한국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서 출발한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일왕의 생일잔치와 승전 축하식이 열리는 자리에 윤 의사는 물통 폭탄을 던졌고 시라카와 일본 상해사령관 등이 목숨을 잃었다. 윤 의사의 상해의거는 죽어가는 임시정부를 살려 놓는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정치적 분열을 겪던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장개석은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정규군으로 광복군을 조직했다. 상해의거에서 임정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지며 카이로선언에 영향을 준 것이다.

넷째, 광복군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다섯째, 연합국(미·영)과 협동작전을 수행했다. 여섯째, 국내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다. 일곱째, 나라 안팎에서 이리 저리 갈라져있던 세력을 한데 모아 탄생한 것이 광복군이다.

여덟째, 나라는 망했지만 군맥, 군대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했다. 하지만 이후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광복군이 되면서 군대의 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군맥이 이어졌으니 나라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광복군은 해방 후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인터뷰를 끝내며 김 할아버지는 반드시 기억해 달라며 한 마디를 남겼다.

“나라 잃은 원인을 알아야 되풀이 하지 않는다. 파당 행위·부패·국제 정세 둔감·국민들의 무관심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이슬 기자


저작권자 ⓒ 뉴스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분야별 주요뉴스

| 정치 | 경제 | 사회 | 국제 | 문화 | 연예 | 스포츠 | 북한

이전 다음




핫이슈

‘청주 20대 여성 살인’ 용의자 “험담에 화가 나 범행했다”
20대 여성을 살해해 나체 상태로 유기한 용의자가 피해자가 아이...
“문정인 떠든다” 말했다 혼쭐난 송 국방…야권, 청와대 정면 비판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비판한 발...
남경필, 아들 마약 투약 사건 사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불찰”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19일 오전 경기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
'누군가 엿보고 있다' IP카메라로 불법 촬영 범죄 기승…경찰, “초기 비밀번호 바꿔야”
최근 집안 애완동물 관리 등으로 사용이 늘고 있는 IP카메라가 ...
고급 외제차 위조 휠 수백 억 원 상당 유통…안전사고 발생 우려
벤츠·BMW·아우디 등 고급 외제 자동차의 위조 휠을 국내에...
만취해 고속도로 8km 역주행…트럭 운전자 붙잡아 조사 중
만취한 상태로 트럭을 몰고 고속도로를 8km 역주행한 70대 운...
불법 대부업의 진화…‘지방세 대납 카드깡’ 업자 적발
급전이 필요한 사람의 신용카드로 지방세를 대납하고 수수료를 선공...
성폭력 저질러도 후원하면 감경? 성폭력상담소, “형사사법체계 패착” 질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14일 오전 11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
시민단체, 유튜브 키즈채널 운영자 고발 “아동 정서적 학대”
시민단체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동...
'5·18행방불명자 찾을까?' 4차 암매장지 발굴 8년만에 추진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행불자)들을 찾기 위한 네 ...
맥도날드, “전주 매장 식품안전 이상 없어”…15일 불고기버거 판매 재개
전주 지역에서 햄버거를 먹은 초등학생 등이 집단 장염을 일으켰다...
코레일 "사고 시운전 열차는 새로운 신호장치 점검하던 중"
코레일 "사고 시운전 열차는 새로운 신호장치 점검하던 중"
남편 살해 후 완전범죄 꿈꾼 아내와 내연남…4년 만에 검거
수면제를 먹인 남편을 목 졸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 아내와 내...

많이 본 뉴스

멀티미디어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