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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혼자 재판 받아 서러워"

등록 2018-10-30 15:15:17 | 수정 2018-10-31 12:07:24

"대한민국에서 깨끗하게 청산했으니 일본도 '끝났구나' 할 것"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열린 대법 판결 기자회견에서 이춘식 할아버지가 심경을 말하는 모습. (뉴스한국)
30일 오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이 각각 1억 원씩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 13년 8개월 만이다. 이 사이 피해자 4명 중 3명이 별세했다.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94) 할아버지는 선고가 있은 후 법원 근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 씨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감사하다. 이 말뿐이다"고 말했다. 이 씨는 판결 결과를 듣기 위해 이날 오전 광주광역시에서 KTX를 타고 한달음에 서울로 왔다.

이 씨는 "일본도 한국이 잘 했다고 환영하겠죠. 자기들도 시원하다 하겠죠. 대한민국이 깨끗하게 청산했으니 '끝났구나' 하겠죠"라며 농을 섞어 심경을 표현하면서도 "(재판을 시작한 피해자는-기자 주) 네 명인데 혼자 재판을 받았다. 같이 고생을 했는데 조금만 참고 기다렸으면…재판 결과를 같이 듣지 못해서 서운하다. 눈물이 나오고 서럽기가 짝이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이 씨는 고등학교 재학 중 대전에서 선발한 80명의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 동원됐다. 일본군 출신 사감이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탄차에 석탄을 퍼올리는 단순 노동을 했다. 1945년 1월 일본군으로 징병당해 일본 고베 8875부대 배치돼 미군포로감시원으로 근무했다. 해방 후 가마이시 공장 노무과에 찾아가 월급을 요구했지만 받지 못했고 시모노세키를 통해 귀국했다.

별세한 여운택·신천수 할아버지는 오사카제철소에서 김규수 할아버지는 야하타에서 중노동을 했다. 1997년 12월 여운택·신천수 할아버지가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 전신인 일본제철을 상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오사카지방재판소와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각각 패소했고 2003년 10월 9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상고 기각 판결했다.

2005년 2월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 할아버지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심은 '일본 판결의 효력을 우리나라에서 인정할 수 있고 일본제철이 신일철주금의 채무를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고, 2009년 7월 서울고법은 피해자 4명의 항소를 기각했다.

3년 후 대법원에서 판결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판결이 헌법 취지에 어긋나고 일본제철이 신일철주금을 승계했다며 파기환송했다. 이듬해인 2013년 7월 서울고법은 대법원 판단 취지대로 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이후 무려 5년이 흐른 후에야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씨는 "박근혜가 대통령 할 때 (대법원-기자 주) 재판이 시작한 것인데 해결도 못하고 방치하다가 이제 해주니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여 씨는 2013년 12월, 신 씨는 2014년 10월, 김 씨는 올해 6월 별세했다.


이춘식 할아버지 외 피해자 3명 원고 소개

여운택(1923.6.8.~2013.12.6.)
전북에서 차남으로 출생해 7살에 부친과 사별한 후 모친이 재혼해 충남 논산의 작은 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1943년 9월 평양의 이발점에서 일하던 중 기술 습득 후 귀국해 기술지도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일본제철의 공원 모집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해 1943년 6월 1일부터 1945년 9월 1일까지 1년 9개월 동안 일본제철 오사카제철소에서 크레인을 조작해 용광로에 고철을 넣는 노동을 했다. 현지에서 부족한 식사와 강압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다가 1945년 6월 공장이 폭격을 당한 후 회사의 지시로 청진으로 이동했고, 해방을 맞았다.

신천수(1926.11.21.~2014.10.8.)
전남 장성군에서 장남으로 출생해 부친의 사업 실패로 16세부터 경성 술집에서 일하던 중 친구 권유로 평양 일본식당에 취직했다. 평양에서 생활 중 대우가 좋고 집에서 송금할 수 있다는 일본제철의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해 오사카제철소에서 용광로에 석탄을 넣고 고로를 관리하는 고되고 위험한 중노동을 했다. 도망을 계획하다 발각돼 심한 구타을 당했다. 1945년 3월 오사카제철소가 공습을 당한 후 회사의 지시에 따라 청진공장으로 이동해 토목공사를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김규수(1929.2.12.~2018.6.14.)
전남 담양에서 5남 3녀 중 5남으로 태어나 군산 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인 인쇄소에서 일하던 중 징용영장을 받고 야하타 제철소로 동원됐다. 제철소 안에서 열차 선로를 조작·관리하는 북신호소에서 노동했다. 동료 조손인과 함꼐 도주하다 붙잡혀 일주일 가량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해방 후 여비로 200엔을 받고 9월 초순 시모노세키르 출발해 오던 중 태풍으로 대마도에서 난파했고 9월 하순 부산으로 귀국했다.

(자료제공,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