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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은 피겨스케이팅이요, 김연아는 음악이로다

등록 2019-02-11 17:47:43 | 수정 2019-02-11 17:51:48

‘멜로디카 멘’ 첫 내한공연…‘보헤미안 랩소디’ 완벽 커버

손열음. (대관령 겨울 음악제 사무국 제공=뉴시스)
흰 건반은 얼음판, 검은 건반은 조명을 비추지 않아 어둠을 머금은 공간을 닮았다. 그 위에서 마음껏 정확한 기교와 아름다운 율동을 뽐내는 피아니스트 손열음(33)의 손가락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팔다리와도 같았다.

10일 오후 강원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 은반이 펼쳐졌다. 손열음이 예술감독인 ‘2019 대관령 겨울 음악제’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1주년 기념 음악회로 마련한 ‘소녀, 여왕이 되다’ 무대.

‘얼음여왕’ 김연아(29)에게 바치는 헌사로 예고된 이날 공연은, 헌정을 넘어 교감하는 자리였다. 세계를 호령한 김연아가 선수 시절 경기에 사용한 음악 다섯 곡이 연주됐는데, 관중을 웃고 울린 감동이 음악으로 재현됐다.

정점은 손열음이 지휘자 정치용이 지휘봉을 든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당시 프리 스케이팅 배경곡이다. 김연아는 이 곡의 1악장, 3악장을 편집해 사용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이 곡이 울려 퍼지면 겨울 분위기가 난다.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을 음악적으로 승화했다. 연기는 오선지 위 음표 같았다. 얼음을 부드럽게 지칠 때 피아노 건반을 우아하게 훑는 듯 했고, 힘껏 점프를 한 뒤 내려앉은 순간은 강렬한 타건을 연상케 했다.

김연아가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입은 파란 옷을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고 나온 손열음은 피아노 연주를 피겨 스케이팅처럼 소화했다. 특히 빠르고 역동적이며 활기찬 1악장 연주에서는 김연아가 신나게 얼음을 탈 때의 속도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강렬했던지 악장이 끝나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동안 지속됐다.

김연아, 손열음. (대관령 겨울 음악제 사무국 제공=뉴시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통용되지 않은 매너지만 이날만큼은 연주자, 청중 사이에 암묵적으로 수용됐다. 손열음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청중의 박수에 웃으며 화답했다.

좋은 예술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은유다. 연상, 대조, 유사 등을 통해서 특정 대상을 연상시키는 이 비유법은 예술의 정수에서 발산된다. 이날 무대가 그랬다.

손열음은 이제 ‘거슈윈 스페셜리스트’로 부를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재즈풍을 물씬 풍기는 부분에서도 유연한 연주를 들려준 손열음은 이미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수차례 거슈윈을 연주하며 검증 받았다.

가장 미국적인 작곡가 중 한명으로 통하는 거슈윈은 유럽중심의 클래식 음악에 재즈를 가장 성공적으로 접목한 인물로 통한다. 손열음은 2017년 2월 대관령 겨울 음악제 전신인 평창 겨울음악제에서 소프라노 매기 피네건과 ‘안개 낀 날’ 등 거슈윈의 곡들을 들려주며 새로운 감성을 뽐냈다. 2016년 전국 투어에서도 거슈윈 곡들을 들려주며 기존과 다른 분위기들 전했었다.

대관령 겨울 음악제 사무국이 이날 공연에 김연아를 초대했으나, 스케줄 등이 겹쳐 객석에 앉지는 못했다. 대신 손열음과 김연아는 9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평창올림픽 1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에서 만나 인사했다.

이날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의 ‘아디오스 노니노’ 연주도 명연이었다. 김연아가 2014년 소치 올림픽 때 선보인, 그녀의 마지막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 배경 음악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대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쓴 곡이다. 반도네온 연주자이기도 한 피아졸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디오스 노니노’는 그가 아버지를 잃은 직후인 1959년 만들었다. 일정한 패턴이 없는 난해한 구성이나 부친을 잃은 감정을 쏟아낸 만큼 격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하다. ‘노니노’는 가족들이 그를 부르던 애칭이다. 김연아가 자신의 피겨 경력을 ‘아디오스’(안녕)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걸출한 반도네온 연주자인 고상지는 이날 홀로 처음 무대에 올라 작별의 순간을 새로운 만남의 마중물로 끌어올렸다. 코리안 심포니는 ‘종달새의 비상’, ‘세헤레자데’, ‘죽음의 무도’ 등 김연아가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곡들도 연주했다.

‘멜로디카 멘’. (대관령 겨울 음악제 사무국 제공=뉴시스)
같은 날 이 공연에 앞선 시간대에서는 같은 공연장 내 소공연장에서 유튜브 스타인 ‘멜로디카 멘’의 첫 내한공연이 열렸다. 상표 이름인 ‘멜로디언’으로 익숙한 악기 ‘멜로디카’를 연주하는 듀오다.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할리우드 음악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재조명된 영국 밴드 ‘퀸’의 대표곡이자 영화 제명과 같은 ‘보헤미안 랩소디’ 커버가 하이라이트였다.

퀸이 1975년 발매한 4집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에 포함된 ‘보헤미안 랩소디’는 오페라 록을 개척한 6분짜리 대곡이다. 겹녹음을 180차례나 해 웅장함을 만들어냈고 녹음에만 3주가 소요했다. 멜로디카 멘은 단 두 대의 멜로디카와 간간이 연주한 피아노 소리로 프레디 머큐리 보컬을 포함한 이 곡을 완벽히 소화해냈다.

멜로디카 멘은 미국 피바디음대에 재학 중이던 트리스탄 클라크, 조 부오노가 결성했다. 부오노가 할아버지 소파 밑에서 우연히 발견한 옛 멜로디카가 이들이 뭉친 계기가 됐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다. 팝뿐 아니라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등 클래식, ‘슈퍼 마리오’ 등과 같은 게임 BGM, 영화 ‘스타워즈’ 등 영화 OST까지, 이날 1시간 동안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을 연이어 들려줬다.

멜로디카로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입으로 끊임없이 바람도 불어넣어야 한다. 웬만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감당하지 못한다. 관악기 트럼펫과 트롬본을 전공한 클라크와 부오노여서 가능한 프로그램 구성이다.

앙코르로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주제곡 ‘언더 더 시’, 미국 팝스타 스티비 원더의 ‘이즌트 쉬 러블리’를 들려줬다. 객석은 박수로 리듬을 맞출 뿐만 아니라 어깨를 덩실거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멜로디카 단 두 대로 이뤄낸, 흥겨움이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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